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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 [9월 묵상글] 가족이라는 부르심 - 고승범 요한 신부 21-09-08




올해 9월은 추석을 맞아 앞서 가신 선조를 기리며 온 가족이 모여 한 해의 풍요로움에 감사하는 달입니다. 수도회에서는 수호 성인이신 통고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을 기억하는 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올해는 교황님께서 지정하신 ‘사랑의 기쁨’인 가정의 해이자 성가정의 가장이셨던 요셉 성인을 특별히 기리는 성요셉의 해이기도 합니다. 가을의 시원한 바람과 따스한 햇빛 아래 곡식이 익어 가는 이 시기에 우리 삶의 가을에 대해, 우리 삶 안에서 무르익어가는 인생의 열매에 대해 묵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았으면 합니다.


지난 달, 일이 있어 미국에 다녀왔습니다. 겸사겸사 L.A.에 있는 어머니 산소도 다녀 왔는데, 24년만에 처음으로 혼자 산소에 방문해 차분히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사제 생활을 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그분들의 삶의 기쁨과 슬픔에 공감하면서 제 삶을 되돌아 보게 되었는데, 무엇인가 한 구석에 허전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끊임 없이 기도하고 지혜를 청하면서 하느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깨닫고자 했는데, 제가 가족이 고팠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외동 아들로 태어나 어릴 적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미국 소신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어머니와 지낼 수 있는 시간도 부족했기에 가족과 갈등을 겪을 일은 없었지만 식구들과 부대끼며 살면서 생기는 끈끈한 관계를 체험하지 못했던 것을 머리로는 이해를 한다 해도 마음 한 켠에서는 그리워했던 것 같았습니다. 무의식적으로는 조건 없이 기댈 수 있는, 내가 가장 나약할 때 버팀목이 되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을 그리워했나 봅니다. 이런 제 삶의 결핍을 발견하면서 어머님 산소에서 혼자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강해졌고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내어주시는 마음의 치유는 돌아가신 분이 아니라 살아 있는 가족들을 통해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계시는 외삼촌과 이모를 통해 지난 가족사를 들으면서, 그분들이 가족으로서 짊어지셨던 삶의 여정과 무게에 대해 알게 되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발견하시는 것을 보며 뭔가 마음이 차분해지고 다시 자리 잡아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가 맡고 있는 청년들과 대화를 나눌 때 흔히 등장하는 주제가 가족 갈등입니다. 가족이 없는 것도 큰 상처이지만, 매일 반복되는 갈등 또한 큰 아픔이 됩니다. 때로는 지난 날의 아물지 못한 상처가 현재를 힘들게 하기도 하고, 현재에서 또 다른 큰 상처가 생기기도 합니다. 누구나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받아주는 관계가 가족 관계이지만 가족이란 삶의 여러 상황 안에서 각자에게 주어지는 개별 숙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나는 나의 가족을 어떤 관점, 어떤 기준으로 바라보고 있나요? 무엇을 기대하고 있나요? 내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느님의 관점에서, 하느님의 기준으로 바라보고 있나요? 아니면 알게 모르게 내 욕심이나 상처에서 비롯된 또는 비교에서 비롯된 기준으로 내 가족을 엄격하게 판단하고 있지는 않나요?


신앙적인 관점에서 각 가정은 하느님께서 서로를 위해 맺어주시는 인연의 합이고 각 가정마다 자신들의 삶을 펼치도록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사랑의 기쁨」에서 “가정의 힘은 사랑하는 능력과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능력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가정은 아무리 문제가 있다 하여도 언제나 사랑에서 출발하여 성장할 수 있습니다(사랑의 기쁨, 53항)”라고 말씀하십니다. 각 가정마다 주어지는 상황들이 있고, 개인의 성격들이 있으며 삶의 상처와 아픔들이 있습니다. 가장 큰 상처의 근원이 가족일 수도 있지만, 가장 큰 위로와 치유 또한 가족에서 비롯됩니다.  가족이야 말로 원래 하느님 사랑의 모상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요셉 성인과 성모님, 예수님으로 구성된 성가정도 피난민의 삶을 살았으며 가난을 경험했고 애도의 슬픔도 겪어야 했지만 이런 삶의 시련들은 그분들의 믿음과 사랑을 키워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보고 계시며 모든 희생과 노력을 알아주시고 우리가 그분을 가정의 중심으로 세워드리는 만큼 가정의 평화와 기쁨의 원천이 되고자 하십니다. 통고의 성모님이야 말로 성가정 역시 겪어야 했던 삶의 고통에 대한 표지이자 더 나아가 주님께서 각 가정에게 주시고자 하는 은총의 증인이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아버지의 마음으로」라는 교서에서 요셉 성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삶에는 종종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에 대한 우리의 첫 반응은 흔히 낙담과 저항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삶의 다양한 현실을 수용합니다. 아무리 이해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를 받아들이며 그에 대해 책임지며 자기 역사의 일부로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력과 화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기대와 그에 따르는 실망감의 인질로 남아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우리가 따라갈 수 있도록 보여주는 영적 길은 모든 것을 설명하는 길이 아니라 수용하는 길입니다. 수용과 화해가 이루어져야만 우리는 더 넓은 역사와 더 깊은 의미를 엿보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힘겹게 견디고 있는 고통에 저항하라는 아내의 권유에 욥의 간절한 응답이 울려 퍼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욥 2,10).


하느님께서 요셉에게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아라.”(마태 1,20)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요셉은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아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모든 분노와 낙담을 떨쳐버리고, 우리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더라도 단순히 단념해서가 아니라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더 깊은 의미에 열리게 됩니다. 우리가 복음에 따라 살아갈 용기를 얻으면, 우리는 기적적으로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가족이야말로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부르심이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성장과 성화의 길입니다. 완성형이 아닌 진행형인 만큼 같이 헤쳐나가야 할 일도 많겠지만 인내하는 만큼 같이 기뻐하고 즐기고 감사할 일도 많을 것입니다. 때로는 기다리고, 때로는 용서하며, 때로는 용기를 내어 직면하면서 마음과 마음의 진정한 소통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정답과 해답을 찾기 전에 서로를 찾고 서로에게 하느님의 섭리와 사랑의 표지가 되기 위해 청하며 노력한다면 아픔도 슬픔도 우리에게는 삶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지 않을까요? 지금 우리는 우리의 가족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는지요? 지혜의 원천이신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마음을 밝혀주시길, 모든 힘의 근원이신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용기를 불어 넣어주시기를 청하는 한 달이 되길 바랍니다.


삶에서 가장 강렬한 기쁨은 우리가 다른 이에게 기쁨을 줄 수 있을 때에 생겨납니다.

이는 하늘 나라를 미리 맛보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의 기쁨, 129항)